0 초2 아이의 방학이 끝나간다. 내 방학도 끝나간다. 원하는 만큼 잤고 시간날 때 한번은 봐야만 할 것 같은 사람들도 챙겨 만났고 아이와 가보고 싶던 곳도 다녔다. 듣기좋은 노래도 찾아듣고, 눈길가는 책도 읽었다. 아이 하원시간에 맞춰 반갑게 눈맞추고 손 흔들어주는 평범한 일상을 반복했다. 보통 방학 끄트머리에 가서는 한 것도 없이 벌써 개강이 코앞이네..이렇게 한탄과 두려움이 엄습하기 마련인데 이번 방학도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하지 못한 것보다는 한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물론 하지 못한 것은 주로 직업적 욕망과 관련된 것들이고, 한 것은 소소한 일상을 채운 것들이라 공정한 비교는 아닐 수 있다) 40 중반이 되니 세속적 욕망보다는 평온한 마음으로, 남들과 비교하고 나를 탓하기 보다는, 괜찮다는 격..
0 학기는 점점 다가오고 학부수업 수강신청 인원은 괜찮지만 대학원수업 정원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대학원 신입생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 정규학기 수강신청 정원 미달로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작년에는 그나마 타 전공 석박사생들이 들어와서 다행이 정원을 채울 수 있었는데 그런 일이 이번 학기에도 운좋게 반복되기를 바라는 건 요행일 뿐이겠지만 그냥 케세라세라, 될대로 되라라는 생각이다. 나와 달리 학부수업 수강신청 정원 미달로 고민중이신 어떤 교수님은 학과 행정팀이나 학과장님과 연락을 취하며 발빠르게 행정적 절차 차원에서 어떻게든 손을 써보려고 애쓰고 계신다. 나는 그냥 내 수업의 존폐를 하늘에 맡기는 수준으로 관망하고 있는데 그냥 전전긍긍, 아둥바둥 한다고 뭐 내 뜻대로 되는게 없다는 걸 어느 순간 ..
0 공휴일 아침. 새벽까지 거실에서 혼자 SNL을 보고 느즈막히 잠든 남편을 휴일이니 푹 자게 냅두자 싶었다. 평소처럼 일어난 나는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미뤄뒀던 냉장고 정리라는 거사를 도모했다. 김치, 콩자반, 깻잎..어떤 반찬통에는 허옇게 곰팡이가 슬어 있기도 하고 치워야하지만 냉장고에 떡하니 두고 살아왔던 락앤락통이다. 아직 몇 개 더 남았지만 그 많은 음식물을 처리했고 양념이 진득히 묻은 반찬통 설거지를 어느 정도 마쳤다. 그래도 여전히 남편은 숙면중이다. 이번엔 청소기를 돌리고 밀대로 닦기도 했다. 마침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날이라 역시 미뤄뒀던 안보는 책 무더기랑 큰 택배박스부터 차례차례 버리고 오기를 반복했다. 여전히 남편은 깰 생각이 없다. 내가 청소하느라 정신없던 사이, 아이는 TV를 보며 ..
0 늘상 써오던 단어가 난데없이 무진장 낯설어 보일 때가 있다. 지금 '걷는'이란 말을 쓰다가 왜 걷다일까, 뭔가 ㄷ이 받침(어라, 받도 그러네...)으로 들어가는 낱말에 갑자기 어색함이 느껴진다. 사람이 걷는 모양과 비슷하자면 '것다'나 '겄다'도 있을텐데 왜 '걷'이 됐을까. 숟가락도 그렇네, 갑자기 ㄷ받침을 쓰는 모든 낱말이 어색해진다... 0 토요일엔 모처럼 이케아에 갔다. 나는 주기적으로 이케아에 가보고 싶어하지만 남편은 이케아 쇼핑을 싫어한다. 그래서 연중행사처럼 가는 곳인데, 이번에는 나랑 아이는 이케아를 둘러보고 남편은 카페에서 일하겠다고 서로 타협을 봐서 주말 이케아행이 성사됐다. 딱히 집꾸미기나 살림에 관심이 있어서 이케아 가는 걸 즐기는건 아니다. 고단했던 유학시절, 방학때나 긴 연휴..
0 보드카레인의 숙취를 들어야하는 날이다. 숙취가 심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짚어보면, 나는 주로 와인류를 마신 후 숙취가 가장 심하고 오래가는 편이다. 맥주는 몇 캔을 마셔도 그렇게 머리가 아프거나 숙취로 고생하진 않는데 와인은, 레드건, 화이트건, 스파클링 와인이건, 한 두잔 이상 마시기 시작하면 다음 날 속도 울렁이고 머리는 무겁고 어지럽다. 어제는 산부인과 검진을 다녀왔는데 예전부터 나와 공생한다는 걸 알고 있었던 자궁근종 외에 다른 이상은 없었다. 미국에서 임신했을 때 초음파를 하면서 그 존재감을 처음 알게된 근종인데 미국 산부인과 의사는 혹때문에 태아가 자라는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며, 그냥 그런게 있다는 걸 알고는 있으라고 일러줬었다. 그래서 나도 뱃속 아기를 열달간 품는데 문제가 없다면..
0 오늘은 말복인가보다. 아버님은 늘 아침마다 본인이 손수 편집하시는 이미지 파일에 아침인사를 적어 보내신다. 며느리인 나 뿐만 아니라 연락처 리스트에 있는 분들께 다같이 보내신다. 거기에 강아지 얼굴 사진을 넣어 말복 인사를 보내셨는데 그 강아지 사진이 꼭 20여년전 키우던 우리집 짱아랑 똑 닮아 있다. 잉글리쉬 코커 스패니얼. 황갈색 털이 덥수룩하고 푼수끼 많고 산만하던 짱아. 그래서 예민한 아빠의 심기를 늘 건드렸고, 뒤치닥거리를 귀찮아하던 엄마에게 애물단지였지만, 그래도 가족들의 관심과 애정을 듬뿍 받던 우리집 유일무이한 반려견이었던 짱아 생각이 난다. 최근 유명가수 반려견이 애완견 전용 호텔에 맡겼다가 숨져 이슈가 된 적이 있듯 짱아도 동물병원에 입원 시켰다가 사흘만엔가...무지개다리를 건넜으니..
0 오늘 아침엔 커피 한잔 마시며 '마음의 문법'(이승욱 지음)을 읽었다. 이 책의 부제가 '마음의 정상성에 대하여'인데 내가 이해한 바로는 부유하는 마음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 자기 스스로 바라보고 충분히 이해하며 받아들이는 상태를 '정상성'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렇게 매일의 일상을 내 언어로 재구성하며 반추하는 지금 이 행위 자체야말로 내 마음의 정상성을 찾고자 하는, 혹은 정상성에 머무르고자 하는 노력인 셈이다. 아래 인상적인 구절들을 남겨본다. "진정 우울한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두려워 끝내 '자신'을 학대한다. 부당한 상황에서 분노하지도, 정당하게 요구하지도, 사실 관계를 논리 정연하게 따져 잘잘못을 바로잡지도 못한 자신의 못남에 대해 분노하고, 또 자기 마음을 학대한다. 그래서 ..
0 아이가 최근 '모여봐요 동물의 숲' 놀이에 빠져들었다. 외동인데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연락해서 같이 놀 수 있는, 곁에 둔 친구가 없다. 학교가면 친구들과 곧잘 어울리고 죽이 잘 맞는 몇몇 친구도 있는 듯 보이지만, 아직 핸드폰이 없어서 그런가,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방과후나 주말에 따로 연락해 보는 친구가 없다. 학원에서 보고, 놀이터에서 만나면 정신없이 뛰어놀기 바빠도, 헤어질때 so cool하게 인사를 하곤 집에와서 혼자 논다. 동물의 숲에서는 비록 이름은 무인도이지만 고립된 섬에서 몇몇 구성원이 함께 지내며 가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격려와 지지를 나눠서 그런지 어제는 갑자기 나에게 5초만 눈을 감아보라며 식탁위에 구깃한 종이를 놓고 갔다. 동숲 우편함에 메일을 적고 답장을 기다리던 아이가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