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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simba 2023. 8. 24.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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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년 만에 하는 대대적인 공습대비 민방위 훈련이라 해서 뭔가 특별한게 있나 싶었는데

내가 자리를 스벅에서 학교 오피스로 옮겨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학교에서는 사이렌 소리만 들렸을 뿐이다. 

분명 텅 빈 건물이 아닌데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듯 조용했다.

시민들은 원래 일상으로 돌아오셔도 된다는 행안부의 문자가 무색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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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장내시경 검진 예약이 있으신 시어머니의 보호자 자격으로 내가 동행해드리기로 했기에 

아침 6시 반에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만 65세 이상이신 분들이 수면내시경(요즘 병원에선 진정내시경이라고 부른다는 걸 오늘 가서야 알았다...)으로 검진을 할 때는 보호자를 필히 동반해야 한다는데, 남편은 평창 워크숍에 참여중이고, 시동생은 요새 프로젝트로 무척 바쁘다 한다. 

그래서 아직까지 방학인 내가 나섰다.

 

오전에 검진이 예약돼 있어 아이 등교시간 전에 집을 나와야했기에

급하게 친정엄마를 소환했다. 나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하니 하루 주무시고 내일 손주 등교시간까지 집에 좀 계셔주시라. 부탁했고, 나는 5시에 일어나 엄마와 아이가 먹을 아침상까지 정성껏 차린 후 집을 나선 것이다. 

내가 철이 들어서라기보다 딸집에 와서도 손님같이 머물다 가시는 울 엄마 스타일을 이미 잘 알기 때문이다. 

딸집에 반찬 해주기? No, 딸집에 와서 한 끼 해주기? No, 심지어 딸집에 와서 차린 저녁 같이 드시자해도? No...

그 연세에 철저한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주의가 체현된 울 엄마다. 

그래서 가끔 남편과 TV를 보다 '사위 사랑은 장모', '장모님표 밥상', '씨암탉 잡아주는 장모님'  이런 류의 화면이나 자막이 나오면 괜실히 속으로 찔리기도 한다. 딸도 '니가 알아서 잘 살아라' 주의인데 하물며 사위는...더 거리를 두신다.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아이와 같이 있어달라고 부탁할 땐 거절 안하시고 도와주시니 워킹맘인 딸로선 그런 엄마의 존재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무튼, 지금은 어머님 내시경 검진 잘 마친 후 택시로 시댁에 잘 모셔다드리고 나는 서울과 경기도를 오가며 거리에서 도합 4시간을 보내고 학교에 도착했다. (아침에 경기도 가는 버스에선 우연히 곽진언의 '일종의 고백'을 듣게 됐는데 '나의 해방일지' 삼남매가 출퇴근 때 보던 버스 창밖 풍경이 이랬겠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나름 특별한 일정이 있는 날이었는데 돌이켜보면 뭐 하나 어긋난 것이 없어 smooth하게 잘 흘러갔다. 

 

나이를 허투루 먹는게 아니라는 걸 느낄 때는 바로 이렇게 나이가 쌓아올린 무수한 시행착오 경험을 통해 오늘 같은 날, 내가 멍청한 실수를 범하지 않고 능숙하게 잘 해내는 구나를 느낄 때다.

 

지금보다 젊었을 땐, 늘 뭔가를 빠트리고 다니기 일쑤였다. 

예를 들어 병원가는데 마스크를 안 챙긴다던지, 카드나 이어폰을 두고 온다든지, 보호자 신분증을 안 챙겨온다던지, 

핸드폰 충전을 안해와서 밧데리가 간당간당 한다던지...사소해보이지만 어딘가 허술한 실수들로 당황하거나 낭패를 본 경험이 잦은데, 하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하다보니 왠만큼 나이가 든 이제는 대충 내가 어느 지점에서 실수를 많이 하는 지 패턴이 파악되었기에 자연스럽게 그거부터 챙기게 된다. 그러다보니 예전에 비해 실수는 확실히 줄어든 느낌이다. 

 

오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 학교 준비물 챙기고, 엄마가 신경 안쓸 수 있게 아이 루틴대로 옷가지랑 세면도구 챙겨놓고, 아침상 챙기고, 내 가방 속 중요한 물품들도 빠짐없이 잘 챙기고, 핸드폰 충전도 넉넉히 해와서 광역버스 안에서 좋아하는 음악도 듣고, 어머님과 병원에서 잘 만나서 수납이나 검진 후 유의사항 챙겨듣는 보호자 역할도 잘 해냈다. 

 

그렇게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광역버스를 타고 교내 파바에서 단팥빵을 하나 사서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와 함께 점심을 해결하는, 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오늘의 미션 수행!

 

너무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정돈된 마음으로 살고 싶은데 오늘은 약간 스스로도 정돈돼 보인다 ㅎㅎ

어제는 아이에게 언성을 높이거나 감정싸움을 하지 않았다.  

 

정돈된 마음으로 정돈된 하루를 살아가는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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